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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ps/93/read?bbsId=G003&itemId=527&articleId=1657213
요즈음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너티독은 마치 스필버그의 영화 같이 보이는 대작 게임을 만드는 회사로 여겨질 것이다. 너티독은 완성도 높은 그래픽과 스토리텔링이 합쳐진 최고의 게임들을 만들어서 게임의 경계선을 넓혀왔다. 90년대 중반의 너티독은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로 널리 이름을 알렸었다. 소니의 퍼스트 파티로 합류한 뒤에도 계속 너티독은 잭과 덱스터 같은 플래포머 마스코트가 될만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왔고 점점 더 발전하여 훌륭한 스토리와 액션이 결합된 언차티드 3부작과 라스트 오브 어스를 제작할 정도로 진화했다. 필자는 이전 소니 벤드 스튜디오의 역사, 소니 산 디에고 스튜디오의 역사,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역사, 인섬니악의 역사 등의 기사를 집필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가장 쓰고 싶어했던 기사는 너티독의 역사이다. 이 이야기를 쓰려고 몇년동안 노력해왔는데 이제야 소니 스튜디오중에서 왕관을 차지하고 있는 너티독에 관한 기사를 쓰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 너티독은 필자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워터 가든에 위치한 그들의 멋진 사무실로 초대해 주었다. 그곳에서 3일동안 지내면서 창립즈음부터 근무했던 직원들,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Evan Wells와 Christophe Balestra, Amy Hennig과 Neil Druckmann뿐만이 아니라 너티독의 공동창립자인 Andy Gavin과 Jason Rubin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너티독은 나에게 20명에 가까운 직원들에 대한 제한이 없는 접근권을 주었고 내가 묻기를 원하는 어떤질문을 어디에서나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 권한을 나는 십분 활용했다. 3일동안 내가 알고자 했던 모든 정보들과 아이디어들을 얻을수가 있었고 내가 여지껏 작성했던 어떤 기사보다도 훌륭한 결과물을 얻어낼수 있었다. 여지껏 쓰여진 어떠한 기사보다도 완벽한 너티독의 역사를 즐기기를 바란다. Colin Moriarty 유태교에서는 남자아이가 13세가 되면 Bar Mitzvah라는 이름의 축하행사를 하게된다. 이 행사에 참가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pre-Bar Mitzvah라는 수업을 이수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서 12살의 Jason Rubin와 Andy Gavin이 만났다. 바로 이들이 훗날 게임 산업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튜디오들증 하나를 창립하게된 루빈과 게빈이었다. 북부 버지니아에서 열린 시몬씨의 수업에서 마음이 맞는 아이들끼리 그룹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수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작은 클럽이 만들어졌었죠"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제이슨과 나 그리고 다른 두명은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마침 우리는 애플2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2년간 프로그래밍을 해왔었죠"게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제이슨은 그때 이미 스스로 작은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그들의 능력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걸 즉시 알아차렸다. 그들의 우정과 계속되는 파트너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2살의 아이가 만든것이지만 제 게임들은 매우 진보된 방식의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고 제이슨은 예술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제이슨은 매우 훌륭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게임에서 훌륭하게 실행시키지는 못했고 제 게임의 그래픽은 솔직히 좋지 않았었죠. 그래서 정말로 빠르게 우리는 서로 "야 우리 뭉쳐야 겠는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그들의 장점을 합친 게임의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시절 비디오 게임과 컴퓨터 사업에 있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모든것이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입니다."라 게빈은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게임기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아이들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빈과 루빈, 그리고 다른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동료들은 컴퓨터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희귀한 때에 살고 있었다. 특히나 그 나이대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문제가 생겼을때 지금 처럼 인터넷이 없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문성이 자라나게 되었다. "정보를 얻을곳이 없었지요" 루빈은 지적했다. "문제가 생기면 답을 구할곳이 없는거에요" 어떤 해답을 얻기위해서 이 소년들은 파워 애플 유저들의 그룹이나 산업 종사자들에게서 답을 얻을수 있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 그 사람들을 저는 언제나 "간달프"라고 불렀지요"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그러한 사람들을 그는 그룹 모임에서나 전화를 통해서 만났었다."어떤 사람은 하얀 긴 수염을 기르고 있던 나이드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특별하게 아는것이 많은건 아니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처럼 온라인 포럼이 없던 때일때에 그분의 대답은 큰 도움이 되었지요. 물론 책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수가 적었어요... 책들은 구글처럼 질문에 해답을 던져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책을 얼마나 살 수 있었겠어요? 온라인에서 찾을수도 없구요." 그당시 가장 중요한 정보의 소스는 바이트 매거진이었지만 그 조차도 정말로 희소했었다. "반대로 보면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을 할줄 모르는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을 할 줄 알면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뛰어난 점을 가지고 있던 것이니깐요"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새로운 파이팅 게임을 만들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때 우리는 캐릭터들을 똑같이 베껴온 것들을 만들었습니다."라고 게빈은 인정했다. "처음 우리는 다른 게임의 캐릭터를 똑같이 베껴오는 것이 안되는 행위라는걸 알지 못했습니다." 이 소년들은 1000 ISO 필름에 다른 게임들의 움직임을 녹화한 후에 프로그래밍을 하여 닌텐도의 유명 게임인 '펀치 아웃'을 PC 버전으로 포팅했다. "솔직히 결과물은 굉장히 좋았습니다."게빈은 자랑스러운듯이 말했다. 그들의 파트너쉽은 문제점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게 했고 루빈과 게빈은 아케이드에서나 할 수 있었던 훌륭한 액션게임인 펀치아웃을 PC로 포팅해 내었다. 하지만 1984년에 재앙이 닥쳤다. 닌텐도가 변호사를 고용해 루빈과 게빈을 고소한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닉 하게도 루빈의 아버지는 지적재산권을 중점으로 하는 변호사였고 후에 소년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불법이라고 지적했지만 아이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외적 요인이 아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던 실수인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디스크에 공디스크를 복사하여 데이터를 날려먹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 백업을 만들려다가 실수로 공디스크를 복사해서 데이터를 모두 날려먹었습니다. 정확히 기억하지만 않지만 12살 소년의 백업을 하는 습관이 모든걸 무로 만든거지요." 그들의 펀치아웃 불법 버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웃기는건 펀치아웃을 날려먹은것이 이들이 게임 데이터를 잃어버린 단 하나의 사건은 아니란 점이다. 제작하던 오리지널 골프게임또한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폭해버린 좌절에서 벗어나 둘은 최초의 오리지널 게임을 재작하게 된다. Math jam이 그것인데 그 당시 유행하던 많은 교육용 애플2 프로그램이었다. 게빈과 루빈은 아직 너티독이란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대신 JAM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Jason과 Andy’의 Magic의 약자이다. 그들의 새로운 회사는 1984년에 세워졌는데 나이가 14살때의 일이었다. JAM은 스스로 게임 퍼블리싱 까지 맡았었는데 그때 많은 인디애플용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하던 방식이었다. 게임을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한후 기본적 조작을 사진으로 찍어 복사한 뒤 집락백에 집어넣어 판매하던 방식이었다. 그들은 1985년 학교 들에게 Math JAM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15세 소년들에게 극복하기 힘든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판매하려면 교육부 정책에 따라 3~4명의 정신학자들과 16명의 선생님들의 인증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게임에 대한 룰이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 거지 같았죠. 말해지는 데로 기준을 맞춰야만 했습니다." 루빈과 게빈은 매쓰 잼을 제작하다 부딪힌 예상외의 문제점 이후로, 좀더 그들의 게임에 대한 열정을 주제로 하는 프로젝트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매쓰잼은 게임이었지만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좀더 수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에 만들것이었죠." 하지만 교육용 제품을 만드는것은 많은 제재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열정이었죠"라고 루빈은 덧붙였다. 그들의 첫번째 게임은 "Ski Crazed"였는데 1986년에 발매했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16세였다. 이 타이틀은 때때로 그들이 아웅다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제이슨이 이 게임을 해킹했었지요." 원래의 게임 제목은 Ski Stud 였다고 말하면서 게빈은 지적했다. "슬로프를 스키로 내려가면서 이쁜이들을 낚아챈다음 뜨거운 욕조로 들어가는 게임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스키 스터드는 잘 구동되지를 않았습니다. 루빈은 베이직으로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정말로 정말로 느렸었습니다. 언덕을 내려갈수록 점점더 느려져서 제가 어셈블리로 다시 프로그램해서 빨라졌었죠." 스키 크레이즈드는 1500장 정도가 판매되었는데 개당 2불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개발도중 그들은 핀볼 컨스트럭션 셋트라는 개발툴 에서 벗어나 테이크 원이라는 개발툴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의 컴퓨터는 부모님이 사주신 것이었고 그 외에 특별히 개발비가 나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익은 전부 다음 게임의 개발자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이 정말로 원했음에도 가질수 없던것이 한가지 존재했다. 그것은 하드 드라이브였다. 작업하다 에러나 실수로 유실했던 경험때문에 게빈과 루빈은 거리 반대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불렀었는데 그 사람은 5메가 바이트 하드 드라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가격은 24000 달러 였었다. "그때 제가 처음으로 메가 바이트 단위의 하드 드라이브를 보고 생각했던것은 이 사람을 꼭 합류시켜야돼!였습니다." 데이터를 날려먹었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게빈과 루빈은 트리오를 구성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합류하지 못했다. 그는 도둑이었다. "사실 그 사람의 하드 드라이브는 절도품이었습니다. 그당시 우리는 그걸 알지 못했었죠. 그 사람은 10만 달러 상당의 카드 사기를 행했었고 FBI에게 체포당했습니다.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 친구는 정말 큰 문제에 빠졌었죠."라고 게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게빈과 루빈은 전에 만들었던 게임으로부터 엄청난 수익을 얻지는 못했지만 16세 치고는 괜찮은 성과였다. 그로 인해 다음 게임인 드림 존은 퍼블리셔인 Baudville와 계속적인 파트너쉽을 유지하면서 발매되었다. 이 게임은 1987년에 발매되었다. 드림존은 많은 양의 텍스트와 그래픽이 결합된 형태의 어드벤쳐 게임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꽤나 진보한 방식의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 게임이 두 콤비가 최초로 만든 애플2 전용이 아닌 멀티 플랫폼 게임이었다. 아마가의 코모도어 시리즈에서도 구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픽이 구린 미스트 시리즈 같은 것이였습니다."라고 루빈은 농담조로 말했다. 타이틀에서 보여지는 대로 드림존은... 음 꿈에 관한 내용이다. 전형적인 형식대로 "한 아이가 이상한 꿈속에 빠지게 되어 그 안에 갇혀버렸다."라는 내용이라고 게빈이 설명했다." 화장실을 통해 꿈의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시된 디지털화된 오즈의 마법사 같은 것을 만들고자했습니다. 꿈의 세계는 흑백으로 현실 세계는 칼라로 묘사했었습니다." 드림존은 Baudville와 JAM모두에게 적당한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게임은 10000장 이상정도 팔렸고 둘은 15000달러 정도의 수익을 그들의 힘들 작업의 대가로 받았다. 17세에게는 꽤나 큰 성공이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좀더 나은 게임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해에 이들은 Baudville과의 거래를 끝내게 되었다. "Baudvilled는 훌륭한 마켓티어는 아니었습니다. 드림존은 많은 가게의 판매데이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이슨과 저는 '어 너무 작은거 아냐'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17세의 해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7세의 나이로 3개의 게임을 개발했다는 경력을 지니고 EA에 거래를 제안하였다. 놀랍게도 그들이 EA에 전화를 했었을때 바로 회사의 결정권자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요청에 따라 드림존의 카피를 EA에 전달했고 EA는 꽤나 이 게임에 감명을 받았다.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요"라고 EA 대표자가 말했다고 게빈은 회상했다. "계약서를 보내드리겠 습니다."라고 EA측에서 전했다. 계약 내용은 15000달러의 개발비를 받고 판매장수마다 10%의 인센티브를 받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EA가 게임 개발자들은 "일레트로닉 아티스트"로 대우해주면서 게임제작자들을 스타처럼 대우해주었다. 이는 EA의 전설적인 창업자인 Trip Hawkins의 방침이었다. EA에게는 불행히도 15000달러의 개발비는 루빈과 게빈이 다음 게임을 만드는데 충분치 않았었다. 새로운 RPG게임인 Keef the Thief 를 만드는데에는 최종적으로 48000달러 정도의 개발비가 들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개발비는 아니었고 여전히 이익을 낼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었다. 게빈은 당시의 EA의 상황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때때로 EA는 개발중인 게임을 취소하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엄청나게 많은 장수를 팔아야지만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EA는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EA는 많은 돈을 벌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훨씬 힘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는 5만불 정도의 예산이 들어간 게임을 40달러나 50달러에 판매했습니다. 때로 20불 정도로 인하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손익분기점까지 몇천장 정도만 팔면되었었고 그 이상이 되면 수익을 냈습니다." 킵 더 시프는 1989년에 애플2, 아미가, MS DOS 버전으로 발매했었다. 이 게임이 최초로 너티독이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된 게임이었고 5만장 정도를 판매해서 게빈과 루빈에게 꽤 많은 양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최초로 게임을 만들때 퍼블리셔의 압박을 받는 경험을 하게되어 이는 후에 이들이 게임을 개발할때의 비젼을 결정하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 "게임은 Groo the Wanderer같은 종류였습니다."라고 게빈은 결론지었다. 사실 심각한 내용의 RPG로 만들려고 했으나 EA에서 원한것은 좀더 익살스러운 것이었고 둘에게 코미디 작가를 붙여주기도 했다. 코믹적인 내용의 강조를 위해 박스에는 만화같은 그림이 들어갔는데 게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의 시장은 코미디 RPG를 수용하기에는 아직 이른 편이었다는 겁니다. 재미는 있었어요. 하지만 이상한 느낌의 재미였지요. 너무 이른 시절에 비디오 게임 라이터가 코미디를 쓴다는 자체가 코메디였지요."라고 루빈은 말했다. "킵 더 시프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하지만 일정량 정도밖에 팔릴 수 없는 종류의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EA가 나중에 저희에게 코미디 게임으로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한것을 기억합니다. 그건 저에게 있어 좋지않은 기분을 들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게임을 만드는데에 저희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계약에 서명을 했고 EA는 저희에게 원하는 것을 지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만과 창조성에 대한 제약을 두고서도 루빈과 게빈은 EA와 계약을 유지하면서 더 야망을 가지고 더 큰 예산을 지닌 RPG 게임을 개발하고자 했다. 코드네임은 Buccaneer였고 EA에 개발비로 9만 달러를 요청했다. 거기에 EA는 동의했지만 결과적으로 게임이 발매될때 개발비는 15만 불까지 늘어났다. Buccaneer는 결국 Rins of Power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개발은 킵더 시프가 개발완료된 1989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게임의 개발은 의외의 곳에서 난항에 부딪혔다. 루빈과 게빈은 이때 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서로 다른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둘은 전자통신장비를 이용해 작업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아마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통신장비를 통해 게임 개발 작업을 한 사람들일 겁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우린 처음에는 300, 다음에는 1200, 다음에는 2400 baud 모뎀을 이용해서 통신을 했습니다." 루빈은 미시건 대학에 재학중이었고 게빈은 펜실베니아 대학에 재학중이어서 지금에 비하면 끔찍할 정도로 느린 (당시로 보면 꽤나 진보한 기술이었지만) 모뎀을 통해서 정보와 데이터를 주고받으면서 개발을 했다. 상황은 학기가 끝나면서 변했다. 방학동안 그들은 버지니아에서 다시 뭉쳐 게빈의 부모님의 집 지하실에서 작업을 여름 내내 했다. 결국 게임 제작기간은 2년을 상정했었지만 3년이 걸렸다. 개발과정을 복잡하게 했던 또다른 점은 링스 오브 파워는 처음에 PC용으로 개발되었지만 나중에는 세가사의 실패한 콘솔인 마스터 시스템으로도 포팅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네시스라고 불렸었다. EA를 방문하는 동안 둘은 제네시스 개발킷에 주목했다. "EA 회사안에 리본 케이블이 붙어있는 제네시스 개발킷이 잇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니터와 연결된 제네시스를 가지고 분주히 일하는 것을 보고 '흠, 저건 분명히 제네시스 개발 유닛 같은데'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EA는 제네시스의 기술을 해석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해 개발된 게임으로 세가와 대우가 좋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계약으로 인해 EA는 제네시스용의 초반 게임을 제작하게 되어 이는 너티독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동안 우리는 이 해킹한 기계를 여기저기 늘어놓고 개발을 했었는데 이 기계는 심한 전자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이 소음이 심한 제네시스용 개발킷은 짜증나는 점도 있었지만 결국 유용한 개발머신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기계를 켜면 같은 전자 기판을 사용한 모든 텔레비젼들이 소음을 내기 시작했었습니다.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저희에게 불평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제네시스 개발킷으로 인해 주위의 집들의 텔레비젼들이 소음을 내게 된것은 확실했습니다. 재미있는건 게임을 개발하면서 패턴이 바뀌면 소음도 패턴이 변화했는데 이점을 이용해 유용한 디버깅을 할수 있었습니다."라고 게빈을 웃으며 말했다. 링스오브 파워는 제네시스로 1991년 발매되어 3개월 만에 10만장을 판매했다. 하지만 EA로 부터 걸려온 전화는 퍼블리셔와 함께 일할때 일어나는 힘든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퍼블리셔는 언제나 쉽게 성공할수 있는 장르와 저렴한 비용만을 찾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말하기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게임이 매진되었다는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하지만 저흰 게임을 추가 생산하지 않을 것일는 겁니다." "EA는 다른 게임들이 더 잘팔릴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발한 게임은 높은 카트리지 메모리 용량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산하는데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세이브를 위한 EEPROM이 들어가니 배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게임은 더 큰 생산비용이 들어가니 EA는 다른 게임을 파는 것이 더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 게임이 매든이었습니다." "이때가 EA가 '머, 우리가 좀더 잘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텐데요'라고 말한 두번째 였습니다."라고 루빈은 계속했다. "존 매든이 포스터에서 다른 선수들과 얼싸안는 포스터하나만으로 쉬운 마켓팅이 가능합니다. EA가 직접 고용한 사람들은 모두 스포츠가이였죠."라고 게빈은 말했다. " 빌딩의 프로그래밍을 하는 부서의 모든이들은 범생이 같아 보였습니다. 조롱하자는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친구들이니깐요. 하지만 같은 빌딩 안의 마켓팅 부서의 모든 사람들은 더 덩치가 크고 옷도 잘 빼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포츠바에 가곤 했죠. 그 사람들은 스타워즈를 인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용과 마법반지가 나오는 우리들의 괴상한 게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 스포츠 게임은 세가제네시스와 매우 잘어울렸다. 결국 너티독은 스포츠게임의 성공에 둘러싸여 갈곳을 잃고 말았다. 더 싸게 개발하고 더 싸게 팔수 있는 게임들에 의해 말이다. 게빈에 의하면 EA의 세일즈 맨들은 스포츠 스타들을 마켓팅에 이용하기 위해 불러오는것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결국 너티독의 게임 스타일은 단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사업의 우선도에서 뒤로 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이후가 너티독이 설립후 유이하게 휴식을 가진 기간이 되었습니다." EA와 함께 개발한 두 게임의 성공과 동시에 EA의 마켓팅에 휘둘리는 두가지 경험을 한 후 게빈과 루빈은 한동안 게임산업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기전(이 게임들은 모두 재학중에 개발했다) 루빈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서핑을 배웠고 게빈은 MIT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했다. 물론 둘다 계획한대로 하지는 못했다. "사실 전 서핑보드를 가지고 파도치는 해변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저는 서핑을 하러 간다고 말했지만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특수효과를 만드는 회사를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3D 그래픽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D는 사실 그때에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다. 당시 3D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75000달러 상당의 컴퓨터가 필요했다. 비싼 가격과 업계에 있어 새로운 기술이라는 점이 루빈이 계약을 맺는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콜롬비아 픽쳐의 잭 니콜슨 주연 울프라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계약을 루빈은 성사했다. "저는 주인공이 늑대로 변화하는 장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수효과를 맡는건 딱 한번 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1993년 3DO 불렸던 콘솔 게임 개발을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DO는 EA의 창업자인 트립 호킨스의 구상으로 부터 출발한 사업이었다. 그는 CD를 기반으로한 고가의 콘솔을 1994년에 발매하고자 목표했다. 호킨스는 너티독의 창업자들에게 연락해 게임산업으로 돌아올것을 제의했다. "호킨스가 전화해서 말하기를, '자네들 우리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다고!'라고 말했습니다."라고 게빈은 회상했다. "개발머신을 원하나? 첵킷아웃!"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게빈은 그때 당시의 문제점에 대해 덧붙였다. "게임들이 이렇게 용량이 거대해지기전인 그 시절엔 카트리지 생산때문에 많은 점들이 엉망진창었습니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가격도 너무 비쌌습니다. 재고가 남게되면 벌어들인 모든돈을 잃게되기도 했습니다. " 루빈도 뒤이어 말하기를 "우리는 정말로 카트리지를 싫어했습니다. 세이브가 가능한 거대한 게임을 만들고 싶었지만 카트리지는 벽이 되었습니다. 카트리지 때문에 우리는 매든만 찍기로 했습니다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CD로의 매체 변화는 정말로 큰 사건이었습니다. 원하는대로 빠르게 찍어넣을수 있고 재고가 생기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CD1장을 생산하는데에는 1달러 밖에 들지 않았으니깐요. 경제 체제가 변했갔습니다." 실제로, 너티독은 카트리지에 대항해 CD를 지지하는 쪽의 최전방에 있었다. CD는 로딩이 오래걸리고 쉽게 파손된다라는 단점에 대한 공격에도 그들은 이 주장에 대해 맞서이겨나갔고 결국 너티독은 역사에서 올바른 결정을 한쪽에 남게되었다. 너티독은 호킨스의 개발킷을 받고 3DO용의 좋은 게임을 만들기로 동의했다. 너티독은 링스 오브 파워를 통해 번 금액을 이용해 개발을 시작했고 퍼블리셔와 계약하지는 않았다. 이때 벌어두었던 80000달러의 마지막 1센트까지 모두 쓰였다고 한다. 앤디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제작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종료의 게임이 대박을 터트릴수 있을까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은 당시 유행하던 게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게임들은 사실 앤디와 제가 하고 싶었던 게임들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이 이에 덧붙였다. 그들은 대전격투게임이 적당하다고 느꼈다. "이전 게임을 개발하는데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루빈은 말했다. "RPG 게임은 좀더 크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반면 대전게임은 매우 직관적이다. 캐릭터를 고르면 바로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일단 게임이 실행되면 밸런스 조정을 잘해낸다면 위대한 대전격투 게임을 만들수 있게 느꼈기 때문이다. 1993년 너티독의 웨이 오브더 워리어가 개발을 시작할 당시에 대전격투게임이 최고로 잘 나가던 시기였다. 스트리트파이터2, 모탈컴뱃, 사무라이 쇼다운 등이 아케이드와 거실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는 3DO의 대전격투 게임으로 발매되어 미드웨이, 캡콤, SNK등과 겨룰 예정이었다. "모든 개발 자원들은 화면안의 두 캐릭터에 집중되었습니다. 캐릭터는 매우 컸습니다. 캐릭터들은 엄청나게 많은수의 애니메이션과 동작들을 가지고 있어 당시 성공하고 있던 대전격투게임과는 다른 형태의 밸런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그래서 우린 그때 "이거 큰돈이 될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배경하나를 만들고, 캐릭터 하나를 만들고, 혼자서 대전을 하면서 플레이가 가능해진 버전이 나오면 그때부터 밸런스 조정및 버그 조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루빈과 게빈은 모탈컴뱃과 같은 실사를 디지털화한 방식으로 게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면에선 모탈컴뱃보다 좀더 코믹한 느낌을 주는 게임이었습니다. " 그들은 모탈컴뱃과 홍콩 액션 영화로 부터 영감을 얻어서 게임을 제작했다.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둘은 같은 지역에 살아야 된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루빈은 게빈이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로 이사하도록 설득했지만 게빈은 MIT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에 루빈이 보스턴으로 오도록 설득했다. 게빈은 그들이 함께 살면서 작업을 할 아파트를 구했고 3DO게임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게임에 필요한 사진을 얻기위해 그들은 문을 열고서 복도를 촬영해야만 했고 이같은 작업은 그들의 이웃학생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그러면서 게빈은 밤중 내내 오디오 작업을 해야만 했다. 두명이서 쿵푸의 기합인 "하이야!" "허이챠"같은 소리를 한밤중에 내면서 잠을 자려 하던 이웃들을 깜짝 놀라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특수촬용용의 전통적인 블루스크린을 조달할수가 없어 황갈색의 스크린을 이용했는데 그나마 설치할 자리가 없어 아파트의 유일한 창문이 위치한 곳에 설치할 수 밖에 없었다. 촬영장소가 고정되는 바람에 촬영을 하는데에 계속해서 애를 먹을수 밖에 없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쉽게 개발 가능한 컨셉으로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프로젝트는 결국 두명이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들은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었다. 이 게임이 게빈과 루빈 단 둘이서 작업한 마지막 게임이 되었다. "처음으로 두명만으로 게임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블루 스크린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때문에 픽셀별로 그래픽 수정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들의 결과물을 사랑했고 이를 신시티 스타일이라고 명했지만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밖으로 나갔습니다."루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블루테인 보드를 사서 자르고 가공한후 칠해줄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주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다. 한사람은 법대생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보스턴 토박이였는데 그 사람은 이 경험으로 인해 게임 산업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리드 테스터는 1994년 하버드 졸업 대표를 맡은 데이비드 리우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자면 "사실 게임안에 등장하는 플레이 가능한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밝혔다.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임내에 등장하는 캐릭터중 한명은 게빈의 MIT 교수인 Dr. Rodney Brooks이다. 게빈이 말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로봇공학 과학자입니다."라 하고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은 Vijay라는 인물인데 MIT에서 분자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너티독이 배우를 고용할만한 여유만 없던것이 아니라 코스튬을 제작할 비용조차 없었다. Vijay는 베게 커버로 만든 속옷을 입고 침대시트로 터번을 만들어서 촬영에 임했다. 터번의 전면에 있던 보석은 작은 여자 아이들을 위한 자스민 드레스 킷트를 사용했다. 여기서 자스민은 알라딘 만화영화에 등장했던 캐릭터였다. 제작중에 둘은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루빈은 은행계좌에 6.37달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전 그때 앤디와 함께 라면으로 연명했습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게빈은 그나마 나았는데 해당 14000달러씩 MIT로 부터 연구지원비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남아있던 스텔오 같은 가재도구등을 팔아서 게임을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앤디의 화장실이 얼어서 막혀버렸었지요. 진짜 끔찍했었습니다. 동의 하지요? 우리는 이때 모든것을 게임 제작에 투자했었습니다. 게임쇼에서 부스를 빌릴 비용인 10000만 남겨놓고 그야말로 모든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마지막 자금으로 CES에서 3DO부스를 차렸었습니다. 크기는 3X3 피트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는 제이슨의 개인 모르건과 함께 살았었는데 우리는 1년간 환기를 한번도 할 수가 없어 거실 카펫에는 모르건의 털로 가득했습니다. 이웃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때 우리 아파트를 보고 하는 첫마디는 항상 "으웩 이게 대체 뭔 난장판이야"였습니다. 퍼블리셔 없이 1994 CES에 게임을 출품하여 관심을 끄는 것이 그때 너티독의 기본 전략이었다. 그들의 작고 아담한 부스는 거대한 멀티미디어 게임 부스들에 둘러싸여있었데 그 거대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회사들은 3DO와 유니버셜 스튜디오, 크리스털 다이나믹스 였다. "우리는 그때 크리스털 다이나믹스와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털 다이나믹스의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반정도는 우리 게임의 발매에 관심을 보였었고 나머지 반은 우리 게임의 엔진을 이용하여 사무라이 쇼다운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호킨스씨는 3DO사에 권리를 주자면서 그의 카리스마를 이용해서 설득을 했다고 하한다. 너티독의 두사람은 그의 마법에 걸려들면 안된다고 되뇌일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저는 그때 연필을 다리사이에서 굴리면서 저 남자의 주문에 걸려들면 안돼라고 되뇌이고 있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로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우리에게 와서 많은 추가적인 게임의 개발의 권리와 개발의 자유를 준다고 제의했고 그 제안이 가장 멋지게 여겨졌습니다. 거기에 전 LA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나은 계약 조건이었죠. 우리에게 이 결정은 가장 큰 분기점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3DO와 독점 계약을 맺었었다면 그것이 너티독의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게빈은 설명했다. 유니버셜이 너티독에 창작의 자유를 주고 개발 지원을 약속해 개발된 시리즈가 크래쉬 밴디쿳으로 알려진 게임이다. -다음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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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ps/93/read?articleId=1658146&bbsId=G003&itemGroupId=40
1년반이 걸리고 그들의 모든 돈을 투자한 결과물인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마침내 1995년 3DO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너티독의 미래는 3DO와 함께 계속되지는 않았다. 3DO는 200만대 정도 팔린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발매되었지만 그냥 그런 정도의 판매였습니다. 하지만 유니버셜은 저희에게 '플랫폼을 고르고 IP를 그르고 게임의 타입을 정해라. 우리가 투자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떤 장르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캐릭터 액션게임은 당시 가장 인기있는 장르중의 하나였습니다. 소닉과 마리오 같은 게임 말이죠. 이때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소개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장르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우리의 게임이 독점이 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찾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3DO에서 그러한 전략이 맞아들어갔었기 때문입니다." 캠브리지에 처박혀 작업을 했던 수년이 지난 두명은 차에 타고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크로스 컨트리 드라이빙 중에 두 명은 그들의 다음 게임에 대한 계획을 하면서 여행을 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그들이 만들고 싶을뿐 아니라 시장또한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크래쉬 밴디쿳의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살이 입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어가 진행되면서 게빈과 루빈은 직면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누가 게임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인가? 이제 더이상은 두 명만으로는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점은 웨이 오브 더 워리어의 제작과정에서 증명되었다. 이전 키프 더 시프나 링스 오브 파워를 만들때와는 다르게 게임 개발은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앤디와 제가 항상 원했던것은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넉넉한 자금또한 필요했습니다."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저희에게 '먼저 개발과정을 개선시키기 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했고 저희는 "고용자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니버셜은 "그럼 고용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앤디와 저는 우리들의 회사를 만들어 나갈수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으로 고용된 두 사람중 한 명은 Dave Baggett인데 MIT 재학 시절 게빈의 친구였고 나머지 한 명은 Taylor Kurosaki인데 텔레비젼 방송계에서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경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쿠로사키는 여전히 너티독에서 일하고 있는데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 후반에서 부터 잭 앤 덱스터 시리즈를 발매하던때에는 공백기간이 있긴 하였다. 쿠로사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TV쇼에서 일할때 두명의 남자가 우리가 자주 작업하던 뒷마당을 가진 빌딩에 입주했습니다. 그게 앤디와 제이슨이었는데 동부에서 LA로 이사온지 얼마 안된 발표되지 않은 게임의 제작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두 명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첫번째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뒷마당에서 자주 비쥬얼 이펙트에 관한 작업을 했었습니다." 23세의 쿠로사키에게 있어 이러한 일은 매우 잘 맞는 직업이었다. 쿠로사키는 게빈, 루빈, 배젯과 친구가 되어 뒷마당에서 월리볼같은 게임을 함께 자주 즐겼다. "함께 자주 놀러다니면서 그 세명은 제가 어떤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쥬라식 파크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튀어나갔었습니다. 제가 쥬라식파크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졌던 점은 제가 겨우 라이트웨이브 같은 것을 가지고 작업할때 그들은 실리콘 그래픽스나 파워애니메이터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앤디와 제이슨은 SGIs와 파워애니메이터를 이용해서 비디오게임 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듣고 '오 진짜 그것에 대해 배워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니 그 3명이 말하길 '우리랑 함께 일해보는건 어때?'였습니다. 그게 제가 너티독에서 일을 시작하게된 경위입니다." 크래쉬밴디쿳이란 이름으로 완성되어 출시된 게임은 당시 게임산업계의 유행을 따라간 것이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대전격투 게임의 붐에 편승한것 처럼 크래쉬 밴디쿳도 게임 산업이 3D로 이동해가는 흐름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는 제이슨과 앤디와 함께 임페리얼 팰리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너티독의 아티스트인 밥과 나는 마루에서 잤고 제이슨과 앤디는 킹사이즈 침대에서 함께 잤다. 우리가 작업 첫날에 한 일은 미팅을 하면서 PSX에서 돌아가는 릿지레이서 시연을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면서 "왓더퍽, 이게 뭐야 대체"라고 소리쳤고 우리가 정말로 만들고자 하는 게임을 구상하려고 노력했다."라며 쿠로사키는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니, 세가, 닌텐도 3사 모두 3D 게임에 대해서 이러한 결론을 냈었다. 그리고 각각의 회사들은 다른 종류의 방식으로 그들의 새로운 시스템의 플래그쉽 게임을 제작하려했다. "3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사이드 스크롤 형식이지만 단지 그래픽이 3D인것, 두번재는 카메라가 줌 인 줌 아웃을 하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고정인 경우, 마지막으로 완전 자유시점인 경우 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는 자유시점을 구현할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중반은 첫번째로 세 회사가 비디오 게임 콘솔의 왕좌를 놓고 대결했던 시기이다. 닌텐도와 세가는 닌텐도시스템과 제네시스로 이전세대에서 경쟁했던 사이이기 때문에 세가새턴과 닌텐도64로 재대결 하게 될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첫 참전한 소니가 전쟁의 끝에 다른 경쟁 콘솔의 판매량을 합친것보다 3배이상의 판매를 하게되었었다. 그때당시 소니가 경쟁사에 뒤쳐지는것은 마스코트였다. 세가는 소닉이 있었고 닌텐도에는 마리오가 있었다. 하지만 소니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크래쉬밴디쿳으로 너티독은 모든걸 바꿀수는 있었지만 당시 소니는 아직 마스코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었고 작은팀에 불과 했던 너티독은 그들의 생산품이 그러한 포텐샬을 지니고 있다는걸 몰랐었다. 게빈과 베젯은 기술적인 레벨은 높았었지만 너티독은 여전히 카메라에 대한 마지막 구상이 필요했었다. 다행스럽게도 팀에게는 생각할만한 시간과 자금이 있었다. 계속해서 심사숙고한 결과 그들은 다시한번 3D버존 돈킹콩 컨트리 형식의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캐릭 컨셉이 필요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풀 3D 폴리곤 게임들을 지원했지만 " 그 머신들은 충분히 많은 양의 폴리곤을 지원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게빈은 인정했다. 데이브 베젯은 Dave’s Level Editor 약자로 DLE라는 개발툴을 만들어서 플레이스테이션의 그러한 한계를 확장했다. "처음으로 학생이 아닌 상태에서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모두 함께 작업을 했고 진짜 예산을 배정받아 직원들과 함께 제작을 하는 진짜 직업의 시작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크래쉬 밴디쿳의 캐릭터 디자인은 오랜기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카툰 애니메이터인 Charles Zembillas와 Joe Pearson.과 함께 컨셉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컨셉디자인을 받았습니다." "카메라 워킹과 미리 계산되어 물건들을 집어 던질수 있는것들등 게임에 사용된 모든 요소는 끝내줬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설명했다. "아트 부문에는 세명의 스태프가 있었습니다. 제이슨, 밥, 그리고 저였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움파 프루트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각각 가장 뛰어난 부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밥은 기본적으로 배경을 만드는 데에 뛰어났습니다. 밥이 크래쉬 밴디쿳의 대부분의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제이슨은 애니메이션 부문을 맡았습니다. 밥이 모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게임 디자이너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작업에 전념했지만 모두 함께 조정을 했습니다." 그러한 모두의 작업으로 크래쉬 밴디쿳은 캐릭터로서 디자인 되었다. "긴 시간 동안 크래쉬의 이름은 윌리 더 웜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이름을 좋아하지는 않았었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인정했다. "저는 이름이 크래쉬 웜뱃으로 정해지길 바랬습니다. 지금까지 제 생각에 크래쉬 웜뱃이 크래쉬 밴디쿳보다 더 혀에 딱 달라붙는 발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플레이는 돈킹콩 컨트리에서 큰 영감을 받았지만, 캐릭터 디자인은 루니툰 카툰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크래쉬의 디자인은 532폴리곤을 이용해서 만들어져서 완벽하게 애니메이트 되었다. 크래쉬의 외형은 워너 브라더스의 고전적인 만화 시리즈와 비슷한 그낌을 주었다. 그동안 닌텐도는 3D게임의 역사상 혁명이라고 할만한 슈퍼마리오 64를 만들었고 세가 또한 나이츠 인투 드림즈라는 3D게임을 제작하였다. 두 회사의 퍼스트 파티들은 새로운 그들의 경쟁자가 3D게임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다. 이 당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들의 탄생이 시작되었다. 너티독은 이때부터 소니와의 굳은 관계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소니또한 인디에 매우 친화적이지만 이 당시의 소니는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들에게 정말로 잘해주었었다. 소니는 그들의 콘솔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너티독같은 스튜디오에 많이 기대었었다. 루빈과 게빈은 44~45번째로 플레이스테이션과 계약한 인디 개발자가 되었다. "소니는 매우 적은 인디 개발자들만이 개발킷에 접할수 있던 시기에 특이한 방법으로 계약을 했습니다."라고 게빈이 설명했다. "당시 아무런 결과물이 주어지지 않아도 소니는 후에 퍼블리셔를 찾는다는 가정하에 라이센스 계약을 했습니다." 그당시 너티독이 퍼블리셔와 계약을 했었긴 하지만 너티독은 퍼블리셔에 소속된 회사는 아니었다. 이점이 너티독이 플레이스테이션 개발툴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게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당신이 게임을 개발한다면 퍼블리셔에게 가져가서 그들이 리뷰를 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너티독은 유니버셜과 계약을 하긴 했지만 그들을 위해 일한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의 개발킷을 개발한후 소니에게 말했습니다. '우린 소니의 마스코트가 될 수 있는 게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니는 그 게임을 본적조차 없었습니다. 개발되고 있는 게임의 가치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소니는 크래쉬를 본적 조차 없었습니다." 소니에게 너티독이 작업하고 있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팀은 쿠로사키가 가지고 있는 시퀘스트 스탭과의 커넥션을 사용했다. 그와 게빈은 소니에게 보여주기 위한 데모를 티비쇼 작업장에서 완성했다. 게빈은 테이프를 친구에게 부탁해서 소니의 고위층에게 전달했다. 이를 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카의 사장은 "이건 뭐시여? 끝내주는데? 이런게 끝내주는거지"라고 말했다고 게빈은 회상했다. 테이프를 본뒤에 소니는 "직원들에게 테잎을 보여주었고 본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라고 루빈이 계속했다. 소니는 이 게임의 데모를 본 뒤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것이 이런 것이란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그때 미야모토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말했다. "우리는 마리오64에 대해 어떤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오 64가 공개되었을때 아직도 우리는 게임을 완성하기엔 몇달이 남아있었습니다.마리오64를 본뒤 우리는 '아나 히밤, 이거 진짜 끝내주는데'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정말로 완벽한 다음세대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밀도 있는 배경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를 취하려면 다른 하나를 버릴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때 라이벌 회사인 세가에는 소닉(실은 이때 만들고 있던건 나이츠 였지만), 닌텐도에는 마리오가 있었지만 소니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크래쉬 밴디쿳의 알파버전을 본 뒤 소니는 닌텐도 부쓰 바로 옆에 전시하기로 했었던 그들이 준비하던 첫번째 프로젝트를 치우고 크래쉬 밴디쿳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소니는 유니버셜과 크래쉬 밴디쿳의 퍼블리셔를 담당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마리오와 정면 대결을 위해 크래쉬 밴디쿳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오 64를 처음 본 것은 E3에서였습니다." 이당시 E3에 출품됐던 게임들은 이전 루빈이 예상했던 3D게임의 방식이 적중했다. "2D방식은 나이츠 였고, 2D와 3D의 융합은 저희의 크래쉬 밴디쿳이였으며, 완전한 오픈월드는 마리오 64였습니다. 그리고 3가지 게임모두 완전히 다른 방식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비밀을 고수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츠의 고정된 카메라 형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세가는 그러한 방식이 소닉과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있었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나이츠의 게임플레이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루빈을 설명했다.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밤새워 논쟁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소비자들은 크래쉬 밴디쿳을 높게 평가했고, 저희에게 많은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리뷰에서 크래쉬는 마리오가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결국 우리는 크래쉬밴디쿳을 마리오64보다 많이 판매하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 닌텐도64보다 많은 판매를 한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게임이기 때문에 많은 판매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크래쉬2편과 크래쉬3편에서 계속해서 마리오 보다 더 많은 판매량을 이어갔습니다. CTR(크래쉬 팀 레이싱)또한 큰 성공을 보였습니다. 그 당시 마리오카트보다 많은 판매를 했다고 생각합니다.(작자주: 사실 마리오카트가 CTR보다 많이 팔렸었다.)"라 루빈은 말했다. "마리오64는 정말 끝내주는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쥬얼 적인 측면에선 크래쉬 밴디쿳이 앞서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오는 게임플레이를 배우는데 좀더 큰 곡선을 그렸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크래쉬보다 새로운 게임플레이영역을 만들어낼만큼 창의적인 게임이었지만 그만큼 처음 접했을때 조작법을 배우는게 어려운 게임이었습니다. 3차원에 익숙해져야했고 카메라를 조작하는데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카메라또한 어떤때에 혼란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선 해결된 부분이지만 당시 처음 접했을때 스스로 그 부분에 대해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짚고 넘어가야할점은 게이머들은 그때 처음으로 3D를 경험했다는 겁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카메라와 완전히 자유로운 이동은 정말로 혁명적인 것이었지만 반대로 게이머들중 아무도 이런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언제나처럼 게이머들은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전체 시장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플레이스테이션은 거대 게임 시장에 진입한 처녀 머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필요했던것은 원 버튼으로 플레이 가능한 좀더 쉬운 게임이었습니다." "크래쉬의 개발 목표는 명확했습니다."라고 게빈은 지적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오에서는 항상 여기선 무얼 해야만 하지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배수구를 열거나 물로 채우거나 등등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처음 접했을때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사실 그러한 방식은 정말로 훌륭한 것이고 언어 없이도 소통을 가능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은 존재했습니다." 크래쉬 밴디쿳은 1996년 늦은 여름에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으로 발매되었다. 소니에서 오랫동안 프로듀서를 맡았던 샘 톰슨이 다음해에 너티독에 합류했다. 톰슨은 QA 부문을 맡아 스퀘어에서부터 소니 리버풀, 같은 회사를 담당했었다. 이후 너티독이 크래쉬밴디쿳을 발매하면서 너티독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니는 이전 마스코트 캐릭을 원하지는 않았었다는 점입니다."라고 톰슨은 설명했다. "소니는 브랜드 이름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중점으로 홍보하고자 했었습니다. 모든 다른것들은 그 이후의 문제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후 파라파, 크래쉬 등의 다른 캐릭터들이 내세워졌었습니다. 제가 일을 너티독에서 시작했을때 크래쉬 밴디쿳은 저에게 정말 기똥찬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크래쉬밴디쿳을 종일 플레이했습니다. 그때 전 이 게임에 중독되다 싶이 했었습니다. 그때 제 PS1은 하루종일 가동되었습니다."라고 톰슨은 말했었다. 소니에 있던 시절 PS1으로 크래쉬밴디쿳을 플레이 했던 그는 크래쉬 밴디쿳2의 제작때 너티독에 합류하게 된다. "제가 크래쉬 밴디쿳2의 제작에 합류할수 있던 기회가 왔을때 정말 멋진일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톰슨은 말했다. 하지만 크래쉬 밴디쿳은 소니의 중역진들에게만 히트한 게임은 아니었다. 전세계의 게이머들이 크래쉬에 열광했었다. "크래쉬는 소니가 최초로 서양 개발사를 통해 일본에 발매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었습니다."라고 톰슨은 언급했다. "크래쉬 밴디쿳은 일본에서 100만장 이상을 파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드디어 서양의 게임도 일본에서 성공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전세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후 플레이스테이션은 크래쉬 밴디쿳과 같은 시리즈에 힘입어 성공적인 미래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소니와 유니버셜은 그때까지는 크래쉬 밴디쿳의 개발에 큰 관여를 하지는 않았었다. 쿠로사키는 말했다. "크래쉬 밴디쿳은 성공할 게임이었고 소니가 정말로 크래쉬 밴디쿳을 원하게 될 것이라는건 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쿠로사키에게는 불행하게도 유니버셜과 소니는 크래쉬 밴디쿳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되어 그와 너티독이 생각하고 있던 속편의 발매 시기에 대해 간섭을 하게 된다. "다시한번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또다른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던 모든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소니나 유니버셜이 '오 좋아 이제 니넨 우리 마스코트야'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우리는 휘둘리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때 크래쉬 밴디쿳 2를 2년 정도 후에 발매할 예정의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크래쉬1의 개발이 끝났을때부터 차기작에 넣고자 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주위를 둘러볼수 있게 움직인다거나 완벽하게 새로운 크래쉬의 움직임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기술들을 확장하고자 했었습니다." 이러한 쿠로사키의 아이디어는 결국 3탄이나올때까지 적용할수가 없었다. 실제로 크래쉬 밴디쿳이 엄청나게 성장한뒤엔 "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요.'좋아 내년엔 크래쉬 속편을 발매하는거야'"라고 일정을 알려왔다고 쿠로사키는 설명했다. "1편때는 6명으로 작업을 시작해서 발매할 즘에는 7명이 되었습니다. 속편 개발때 인원이 늘어나고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저는 결국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후 잭과 덱스터3를 개발할기 전까지 7년간 너티독을 떠나게 되었었다. 쿠로사키가 떠남으로서 크래쉬 밴디쿳의 개발에 난항이 생겼지만 너티독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크래쉬는 더더욱 발전했다. 너티독은 크래쉬시리즈의 인기 상승인 Q score(친숙도를 나타내는 기준)에 기반해 분석했다. 루빈은 말했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인지도는 넘사벽이고 미키마우스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13~18세 사이의 나이에서 크래쉬 시리즈는 마리오에 친숙도를 앞섰습니다. 크래쉬의 시간이 왔던거죠. " 크래쉬 시리즈의 성공은 너티독과 퍼블리셔인 유니버셜, 콘솔파트너인 소니와의 관계에 변화를 주었다. "유니버설은 우리에게 첫 게임을 개발할때 투자를 했습니다. 두번째 게임이 개발될 때에는 소니가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유니버셜은 그때 중간에서 소니로부터 돈을 받기만 했습니다. 소니로부터 돈을 받아 90일간 가지고 있다가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수도 있던 자금을요"라고 루빈은 말했다. 소니는 크래쉬의 성공을 기반으로 스스로 플랫포머 게임을 만들어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도 했다. "유니버셜은 소니가 너티독을 퍼스트파티로 영입하기 전에 크래쉬의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소니는 크래쉬가 더이상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나오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 스스로 게임을 개발했었습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그리고 사실 소니 내부적으로 프로젝트 이름이 크래쉬 킬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Harry Jalapeno라는 게임의 개발이었죠.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사실 유니버셜이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단 한명의 예외를 제외하면요. 마크서니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우리와 함께 많은 개발을 했었습니다. 써니는 유니버셜 인터랙티브의 책임을 맡고 있었지만 써니 그 자신은 유니버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너티독에 속했다고 생각을 했지요." 너티독은 크래쉬 시리즈를 발매하면서 회사의 크기를 점점더 불려나갔다. 요즘에 비교하면 여전히 작은 편이지만 말이다. 8명이 오리지널 크래쉬 밴디쿳을 만들었었다. 크래쉬2의 개발 당시에는 16~19명으로 개발 인원이 늘어났다. 3탄 발매때는 23명으로 늘어났고 크래쉬 팀 레이싱때는 30명 정도가 되었다." 크래쉬 시리즈가 성장할 동안 마크써니는 유니버셜을 떠나 너티독과 직접 계약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써니와 유니버셜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함께 이하게 되었죠."루빈은 말했다. "사실 크래쉬3가 나올때쯤엔 유니버셜은 하는일도 없이 중간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돈을 로열티를 통해 벌어들였죠." 써니는 오늘날 PS4의 설계팀 수장을 맡았었고 SCE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Pangilinan은 너티독의 13번째 고용자였는데 1997년 크래쉬2의 개발때 합류했었다. "전 세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세가새턴이 몰락을 시작했던 시기였지요. 세가는 사람들을 해고하는 중이었습니다."라고 Pangilinan은 언급했다. 그는 당시에 많은 세가의 인원들이 소니쪽으로 고용되었다고 회상했다. 크래쉬2는 1997년 11월에 발매하게 되어 너티독이 큰 성장을 이루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새로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고용할수 있었다. 그중 한명이 Erick Pangilinan이었다. 그는 여전히 너티독에서 근무하고 있고 라스트 오브 어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었다. 그는 많은 개발사에서 면접을 보았었는데 -스퀘어 같은- 너티독이 그의 종착역이었다. 그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한 방에 있던 것을 기억했다. "가구들의 배치가 하나도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사람들마다 자기 책상을 가지고 있었죠. 중앙에는 원탁이 있었는데 카페트는 매우 지저분했었습니다. 거기에 개를 키우고 있어서 말이죠." 처음에 그는 실망을 했었다고 한다.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이런 인간들이 크래쉬를 만든거야?' 세가의 마치 리조트와 같은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근무했었던 저는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가에서는 우리에게 자동차를 렌탈까지 해줬지요. 스포츠카를 가지고 여기저기 돈을 뿌리고 다녔었습니다. 다른 스튜디오를 봤을때도 마찬가지였죠. 영화산업 스타일의 게임스튜디오들이었었습니다." Pangilinan이 너티독같이 더 작고 허름한 스튜디오로 옮기게 된것은 직관에 의한것이었다고 한다. "세가는 리조트 같았습니다. 세가에서 우리를 해고하기 전까지 전 제가 뭐라도 된것 같았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단지 사원의 1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를 자르고 나중에 봅시다라고 한마디 한게 다였죠. 전 그걸 납득할수가 없었습니다. 너티독을 보았을때 여기는 마치 가족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거짓없는 분위기를 가진곳이 정말로 제가 일하고자 원했던 곳이라는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티독으로 향해 스튜디오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 인터뷰는 제가 기억하기로 밤 8시에 했었습니다. 스튜디오는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다른 스튜디오와는 다른것이었습니다. 다른곳에선 6시면 모두 사라졌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여전히 다들 일하고 있더군요. 서로 소리쳐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열정적인 진실된 스튜디오였죠." 또한 그는 너티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진 지식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다른 회사에서는 창업자인 루빈과 게빈처럼 모든 지식들을 공유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다른곳에서는 서로 거짓을 말할수 있었지만 너티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티독에서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너티독은 4개의 크래쉬 밴디쿳 게임들을 제작했었고 그중 3가지는 유니버셜과의 계약을 통해 만들어졌었다. 크래쉬 팀 레이싱은 1998년 말에 발매되었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크래쉬 시리즈의 인기는 계속될수 있었지만 너티독과 유니버셜의 관계가 악화되게 되었다. "유니버설에서 비벤디 그리고 다시 액티비전까지 크래쉬 시리즈의 판권이 계속해서 넘어가게 됩니다. 1999년에 가장 성공했던 캐릭터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게 되었던 거죠. " 라고 루빈은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니버셜에게 투자를 받았었고 많은 이들이 유니버셜을 통해 입사했었죠. 하지만 실제로 유니버셜은 무얼 해야하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화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소니에게 디스크를 전해주는 정도였습니다. 소니가 퍼블리셔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만드는건 너티독이고 판매하는건 소니인데 유니버셜 사람들은 뭘하는거였을까요? 우리가 정말로 파트너로 삼고 싶었던건 소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너티독은 크래쉬에 애정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계속해 나갔었다. 크래쉬 팀 레이싱이 그런 게임이다. "크래쉬 팀 레이싱은 너티독의 자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소니에게 네모난 머리를 가진 캐릭이 등장하는 데모를 주고 이 게임은 끝내줄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유니버셜의 관계를 아시죠라고 소니에게 전했습니다." 소니는 이에 유니버셜과 협상을 한후 크래쉬 캐릭을 사용할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유니버셜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크래쉬 밴디쿳은 너티독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크래쉬의 판권소유자가 유니버셜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가지지 못한다는건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티독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속했던거죠? 우리는 누군가에게 소유된것이 아니었습니다." 업계의 베테랑인 요시다 슈헤이가 이 일에 대해 착수했었고 결국 너티독과 유니버셜의 관계를 끝맺게 한것은 마크 써니였다. "마크가 모든 일을 정리한 사람이었죠"라고 톰슨은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써니가 바로 제이슨과 엔디가 유니버셜로 부터 득립할수 있도록 딜을 하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할지를 알았습니다. 지금의 파트너와 함께는 불가능하다는걸요" "유니버셜은 사실 모션 픽쳐 부문에서 사업을 주관했었고 그들중 아무도 정확히 게임개발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아이디어도 없었죠. 단순히 이런 사업이 돈이 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티독이 남기고간 프랜차이즈를 어떻게 활용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크래쉬 팀 레이싱이 너티독이 개발한 마지막 시리즈가 되었고 그 후의 크래쉬들은 다른 스튜디오들에 의해 개발되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 개발을 하게 된것은 액티비젼이었는데 결국 프랜차이즈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너티독의 오랜팀원들은 크래쉬 밴디쿳을 좋아하고 크래쉬 시리즈가 스튜디오와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 커뮤니티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게임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캐릭터 기반의 게임을 좋아했는데 마리오는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었죠. 당시 사람들이 게임에 원하던 것은 밝고 순수했었습니다. 슬라이 쿠퍼나 밴디쿳 시리즈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을 밝았습니다. 소닉같은 경우 그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입니다. 마리오는 닌텐도의 영원한 상징이구요. 우리는 당시 크래쉬라는 큰 마스코트를 가지고 있었었죠. " -3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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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ps/93/read?bbsId=G003&itemId=527&articleId=1658259
"크래쉬 팀 레이싱은 제가 했던것중 가장 힘든 프로젝트였습니다."공동창업자인 제이슨 루빈은 말했다. "그동안 저의 오래되고 진정한 파트너로서 모든것을 함께 해왔던 앤디는 그때 당시 잭과 덱스터의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앤디는 거기에 덧붙였다."거리상으로는 20피트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완벽하게 다른것이었습니다." 당시 너티독의 상황은 PS1에서 PS2용 소프트의 개발로 콘솔이 변화하고 있던중이었고 스튜디오의 규모가 커지면서 게임개발비용이 훨씬더 늘어나게 되었었다. 제이슨 루빈과 앤디 게빈 두 공동창업자가 느끼는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이때 처음으로 두명은 회사를 파는 것에 대해 고려하게 되었다. 5명은 콜라와 맥주를 마시며 현재 업계의 상황과, 소니와 플레이스테이션의 미래와 마지막으로 너티독이 나아갈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 그때쯤에[크래쉬 팀 레이싱이 발매되었을 무렵] 우리는 도쿄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게임인포머 소속 앤디 맥나마라, 앤디 레이너, 그리고 켈리 플록과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켈리는 SCEA를 경영했었던 인물입니다. 우리는 렉싱턴 퀸에서 오전 5시까지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아마 오전 6시였을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건 건물을 나왔을때 이미 해가 떠서 밝았던 때라는 겁니다." 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그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를 팔면 어떨까? 세계에서 이미 1등을 해봤잖아? 이미 1등을 차지해봤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떨어질수밖에 없지'라고 말입니다." "알콜에 취한 상태로 진심을 토해낸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크래쉬 팀 레이싱을 만들면서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말했던 것중엔 중요한 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개발자로서 자금까지 충당해가면서 게임을 만드는것은 한계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게임들의 개발비는 계속해서 커져왔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스테이션2로의 플랫폼 이동은 루빈과 개빈을 머리를 벽돌로 때리는것 같이 괴롭혔다. 1980년대 그들이 했던것처럼 자금을 모으는것은 이미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잭과 덱스터의 개발비에는 1400만불은 필요했고 게빈과 루빈이 투입할수 있던 자금은 225만불 정도였었다. 루빈은 에픽이나 밸브같이 성공적인 독립개발자로서의 입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앤디와 제가 크래쉬 시리즈로 성공할 무렵처럼 많은 독립개발자들은 더이상 많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캐쉬카우 게임인 캔디 크러쉬나 클래쉬 오브 클랜같은 방식의 게임은 그당시에는 불가능햇었다고 한다. "이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손만으로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스스로 자금을 모으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퍼블리셔에 좀더 기대려고 했습니다. 사실 한번 퍼블리셔에 기대면 더이상 독립개발자로 돌아가기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콘솔이나 PC로 발매되는 게임들은 개발비가 1500만달러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는 퍼블리셔와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소니와 정말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소니는 항상 우리에게 결정권을 주고 우리가 만들고 싶어하는 게임을 만들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하나의 회사로서 상대하면서 충분한 비용을 지불해주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덧붙였다."그래서 우리가 달라진게 무엇이냐구요? 자금조달에 대한 부담과 위험을 내려놓고 정말로 좋은 파트너와 침대를 함께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처럼 소니와 관계가 구축될 줄을 알았더라면 훨씬 이전부터 스스로 모든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겁니다. 넘버원이 되어서 앞으로는 내려올일만 남아있던데다 이전과 달라지는 개발상황에서 재정적인 해결까지 한번에 해결해야 되었던 어려운 상황을 말입니다." 게빈이 끼어들었다. "또한 저는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게임들을 만드는 상황은 테이프로 부품들을 덕지덕지 붙여가면서 만드는 로켓과 같다고 말입니다. 테이프로 2만배의 중력을 견뎌야 하는겁니다. 버텨지겠나요? 그때의 상황은 그와 같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이륙하다가 한순간이라도 덕테이프가 중력을 견디지 못하면 하늘에서 공중분해되는겁니다." "또한 고용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부모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직원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경영자로서 실수를 하게되면 모든것이 잿더미가 될겁니다. 소니에게 회사를 파는것은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직원들을 지켜줄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티독은 잭과 덱스터가 개발중이던때에 소니에게 팔리게되었다. 스튜디오는 그들의 퍼블리셔에게 이 새로운 게임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소니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우린 이게임을 정말 좋아합니다. 우린 당신들과 영원히 일하고싶어요.'라고요. 하지만 크래쉬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컨트롤을 잃었었습니다. 크래쉬의 마케팅에 큰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공을 이루었지만 후에 경쟁기종으로 발매되는것을 보고만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니에게 함께 일하고는 싶지만 조종받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소니는 말했습니다.'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회사의 가격에 대한 서류를 보내주세요.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불행히도 제가 서류를 만들어서 제출하니 소니는 협상조차 없이 그냥 받아들이더군요."라고 루빈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 소니가 관대했던건지 제가 저희 회사를 과소평가했던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어난 일을 보면 제가 과소평가 했던것 같아요" 당시 너티독은 잭과 덱스터의 라이센싱 권리만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니가 잭과 덱스터를 소유하는것은 스튜디오 자체를 구매하는 방법 뿐이었다. "게임업계 역사상 가장 양측 모두에게 가장 만족스럽고 성공적인 계약중 하나였습니다."라고 게빈은 말했다. "결과적으로 너티독은 여전히 세계최고의 게임들을 만들고 있고 오히려 점점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니의 독점입니다. 너티독 사내의 협력적인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루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EA를 보세요. 남은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니와 함께한 너티독은 약해지기는 커녕 더더욱 강해지고 견고해 졌으면서도 신뢰를 줍니다. 특히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브랜드를 운영하닌 히라이 카즈 같은 사람은 너티독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요시다 슈헤이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 변호사나 마켓팅 담당, 광고를 맡은 사람들 조차도 너티독과 함께하는데에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소니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위험성과 경영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라고 루빈은 인정했다. "사업을 소유하는데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어떤 괴멸적인 위험이 아닌 자금을 충당할수 없게 되는 위험 말입니다. 이렇게 위험이 사라짐으로서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너티독은 항상 독특하고 색다른 가치를 추구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니는 자금을 충족하게 대줄뿐아니라 하고싶은것을 할 수 있는자유를 주었습니다. 마켓팅 부문의 사람들이나 소니 내부의 프로듀서, 향후를 예상하는 위원회들의 간섭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완벽한 것으로 말입니다. 너티독은 여전히 독립개발사처럼 운영되고 있지만 소니는 그 뒤쪽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되면서 회사를 팔게 되는걸 두려워하지 않게됐습니다." "소니는 너티독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됐지만 여전히 많은 다른 회사들에 비교해 좋은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너티독의 시네마틱 영상의 리더인 Josh Scherrs는 말했다. "소니는 우리가 어떻게 크래쉬 시리즈를 성공시켰는지 알고 있습니다. 소니는 황금알을 꺼내기 위해 거위의 뱃속을 가르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게빈과 루빈은 2001년 초에 공식적으로 너티독을 소니에 매각했다. 두 공동창업자의 말에 의하면 회사내에서는 거의 바뀐것이 없었다고 한다. "제가 너티독에서 일을 시작했을때 모든 사람들은 '오 너 소니에서 일하느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배경 아티스트인 Reuben Shah 는 회상했다. "하지만 제이슨 루빈은 제가 일을 시작했을때 '아니 넌 너티독을 위해 일하는거야. 우린 소니의 자회사중 하나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여전히 일을 하는 방식이고 소니가 계속해서 이어나갈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니는 우리를 그냥 하고 싶은데로 하게 놔뒀습니다. 우린 우리가 만들고 싶은걸 만들수 있었습니다." 아트 디렉터인 Erick Pangilinan은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우린 소니의 아이들과 같습니다. " 여기에 Shah는 이렇게 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소니는 우리를 신뢰합니다. 소니는 마치 '오 내 페라리에 기스를 내진 않을거지? 가서 타고 놀아라. 잘타고 돌려놓을걸 난 믿는다.'라는 부모님처럼요." 샤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보통 우리 그러고 있는거 맞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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